날씨는 더웠다. 여름철 평균기온이 섭씨 40도에 육박하는 터키 남동부 지역의 특성이라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었고 하필이면 이 시기에 방문한 실책 아닌 실책을 탓하며 창 밖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날 숙박한 하산케이프에서 미디야트를 거쳐 이라크 국경 부근에 있는 성 가브리엘 수도원까지 갔다가 마르딘에 도착하니 해가 뉘엿거리고 있었다. 찜통같은 날씨에 에어컨도 시원찮은 돌무쉬에 하루 종일 시달린 터라 시원한 냉수와 샤워가 그리웠지만 우리의 계획은 무참히 좌절되고 말았다. 관광업이 발달하지 않은 도시라 배낭족을 위한 중, 저가 숙소는 아예 없었고 고공행진의 숙박비를 자랑하는 고급숙소만 몇 군데 있을 뿐이었다.

사실 살인적인(?) 숙박비를 감수하고서 남동아나톨리아의 끝자락 마르딘을 찾은 건 메소포타미아 평원을 보고 싶어서였다. 문명의 발상지라는 점을 꼽지 않더라도 가공되지 않은 날것의 사막과 평원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차창 밖으로 황량하고 건조한 풍경이 지나가며 바람이 불 때는 노란 먼지가 풀썩거렸다. 마르딘을 비롯한 터키의 남동부 지방은 온통 돌이다. 사막기후가 완연한 연한 노란빛의 흙과 돌이 온통 도시를 뒤덮고 있어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집인지 땅인지 구별이 안 가는 경우도 있다.

천의 얼굴을 간직한 터키에서도 마르딘의 위상은 각별하다. 지리적으로 시리아와 인접해 있는데다 터키인, 쿠르드인, 아랍인, 시리아인 등 다민족이 어우러져 이국적인 면모를 보이는 곳으로 단연 으뜸이다. 도시 이름인 마르딘도 시리아어로 성채를 의미하는 ‘메르딘’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우뚝 솟은 바위산 아래 경사면을 따라 신학교와 자미와 집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고 산의 발끝부터는 끝을 알 수 없는 거대한 메소포타미아 평원이 이어진다. 그 옛날 아랍의 대상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바다같은 이 평원을 가로질러 아나톨리아 고원의 입구인 마르딘까지 와서 거래를 했으리라. 한 번의 장사로 팔자를 고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하니 목숨을 걸고 떠난 대상들의 심정이 헤아려지기도 한다.
 


대상들의 흔적도 더듬어볼 겸 옛 정취를 간직한 재래시장으로 들어섰다. 도시에서 가장 크다는 울루 자미가 시장 안에 있어 자미 순례를 겸해 시장 구경에 나선 것이다. 어느 도시든 시장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공간이다. 어디서 금방 잡았는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양고기가 투박한 양팔 저울에 매달려 흥정하는 이들의 고성이 오가는 푸줏간을 지나 도대체 몇 종류나 되는지 셀 수 없는 치즈상인의 호객을 뒤로하고 아랍풍의 옷을 입은 아저씨와 어깨를 부딪치며 걸어가니 과일전이 이어진다. 낯선 곳에 가서 그 곳 사람들의 습성을 파악하는데 재래시장만한 데가 없다.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울루 자미에 도착하니 먼저 거대한 높이의 미나레(이슬람 사원의 첨탑)가 이방인을 맞이한다. 본당은 일반적인 자미와 달리 직사각형의 기다란 건물이었는데 원래 시리아 정교회 건물로 쓰던 곳을 자미로 개조했다고 한다. 자미 옆에는 병설 신학교가 있었는데 마침 수업이 끝난 시간이라 경내에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새소리처럼 깔리고 있었다. 잠시 그늘에 앉아 쉬고 있노라니 우리 생김새가 희한했는지 어린애들이 삼삼오오 다가온다. 한 녀석에게 이름을 물어보니 '베냐민'이라고 한다. 야곱의 막내아들 이름이다. 베냐민은 우리가 신기한지 자기가 나서서 자미 이곳저곳을 안내해 주었다. 자미를 천천히 둘러보고 들어올 때 봐 두었던 정문 앞의 찻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서너 명의 동네 젊은이들이 운영하고 있었는데 베냐민이 인사를 한다. 이층으로 올라가니 메소포타미아 평원 전망이 썩 좋은 테라스가 나온다. 차를 주문하고 벌써 우리와 친구가 된 베냐민에게 먹고 싶은 걸 고르라고 했더니 손사래를 치며 싫다고 한다. 옆에 있던 동네 형이 괜찮으니까 고르라고 하니 그제서야 그럼 콜라를 마시겠다고 한다. 그러더니 뭔가 생각났다는 듯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더니 밖으로 나간다. 잠시 후 잘 접은 종이 박스를 가져와서 뿌듯한 표정으로 우리 앞에 내 놓는다. 뭔가 싶어서 안을 들여다봤더니 노란 병아리 두 마리가 있다. 자기가 키우고 있는 거라고 하며 동생도 손을 못대게 하는 귀한 거란다. 우리에게 콜라를 대접받았으니 자기도 뭔가 '손님대접'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체면과 염치를 차릴 줄 아는 것이다.

터키의 동부가 서부지방과 다른 점이 여러 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아이들이다. 서부 터키는 여느 한국 아이들처럼 부모에게 의존하는 경향이 많지만 동부의 아이들은 일곱 살 정도만 되면 벌써 반 성인이다. 제 할 일을 알아서 함은 물론이고 집안에서 한 사람 몫을 하고 말도 어른스럽게 한다. 예전 우리나라의 시골 아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잊고 살았던 우리의 모습을 베냐민이 일깨워주는 것 같아서 꼭 껴안고 아쉬운 작별을 하고 다시 시장으로 나왔다.


바쁠 것 없는 걸음으로 이국적인 풍취를 즐기며 어슬렁거리다가 어떤 아저씨가 뭔가를 그리고 있어 가까이 가 봤더니 웬 희한한 그림이었다. 머리는 사람 여자고 몸통은 비늘이 있는 뱀인데 신기하게도 몸통 아래 다리가 달려있고 꼬리는 뱀 머리가 아닌가! 별 희한한 그림도 다 있구나 싶어 자세히 들여다보는데 아저씨가 뭔가 설명하려고 한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그림 속 주인공의 이름은 '샤흐마란 Shahmaran'이라고 하는데 기괴한 생김새와는 달리 병을 치료하고 사람들에게 빛을 가져다주며 풍요를 관장하는 지혜의 신으로 사람들의 섬김을 받고 있었다. 뱀은 고대 그리스에서 치료의 힘을 가진 것으로 믿어 의료 신의 상징으로 추앙받았고 현대에 들어서도 국제보건기구의 상징으로 쓰일 정도로 인간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데 이곳에서도 인류 보편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는 셈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징그럽게 생각했으니 이런 실례가 있는가!


오후에는 수도원과 신학교를 다녀왔다. 시가지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자파란 수도원'은 지난 시절 시리아 정교회의 총주교좌가 있던 유서깊은 곳이다. 자파란은 '사프란'이라는 뜻이라고 하며 B.C 1000년 경 창건되었고 처음에는 태양신을 모시던 신전이었다고 하는데 지하에 태양신에게 제사지내던 공간이 남아 있었다. 무정물도 오래되면 생명이 깃드는 걸까? 오랜 세월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수도원의 돌들이 말을 거는 듯한 착각이 들어 가만히 쓰다듬어 주었다. 바람 한 점 없는 오후의 햇살은 강렬했고 인적 드문 수도원 마당에서 그만 현기증이 나며 길을 잃을 것 같았다.

다시 시내로 돌아와 두 곳의 이슬람 신학교를 둘러보고 평원이 잘 내려다보이는 노란 색 간판의 PTT(우체국) 맞은편 찻집에 앉아 차를 마셨다. 옛날 대상들의 숙소인 케르반사라이를 보수해 우체국으로 쓰고 있는 것이다. 고풍스런 석조 건물이 지금까지도 쓰임새를 다하고 있어 반가웠는데 몇 년 전 터키 TV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의 무대가 되었던 곳이라 터키 관광객들에게는 빼 놓지 않는 기념사진 촬영장소가 되었다. 사실 별 볼 일 없는 지방도시에 불과했던 마르딘이 유명하게 된 데는 드라마의 힘이 컸다는 후문이다. 미디어의 힘이란... 마르딘의 PTT가 한국의 정동진처럼 망가지지 않기를(?) 바라며 홍차를 홀짝거렸다.

관광객도 돌아가고 어둑해질 무렵까지 메소포타미아를 바라보며 앉아있었다. 바다같이 넓은 평원에서 건조하고 뜨듯한 바람이 불어왔다. 어디선가 대상들의 노랫소리가 낙타 방울소리와 함께 들리는 듯했다.



마르딘 여행정보

지리적으로 터키의 남동부 끝자락에 있기 때문에 방문하기가 쉽지는 않다. 이스탄불에서 버스로 간다면 20시간이 소요되는데 다행히 국내선 비행기가 매일 다니고 있다. 성자 아브라함의 탄생지인 샨르우르파와는 2시간 30분 거리며 인근의 미디야트, 하산케이프를 방문하는 기점으로 활용하기에도 편리하다. 누사이빈 Nusaybin을 통해 시리아로 넘어갈 수도 있다. 남동 아나톨리아를 여행한다면 마르딘을 꼭 빼 놓지 말기 바란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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